
공존의 집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건축사사무소의 책상 위에는 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도구가 놓여 있었다. 한때는 제도판 위해 빳빳한 트레이싱지와 날 선 연필이, 그다음에는 PC와 모니터 화면 속에는 AutoCAD가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2023년 챗GPT의 등장 이후, 오늘날 우리의 삶 전반에 걸쳐 'AI'라는 보이지 않는 도구가 놓여 있다. "건축사는 AI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한 직능의 생존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창의성이 기술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재정의할 것인지에 관한 본질적인 물음이지 않을까.
도구는 바뀌어도 '왜'는 바뀌지 않는다
건축의 역사는 과학, 기술, 도구의 혁신과 궤를 같이 해 왔다. 르네상스의 원근법, 근대의 철근 콘크리트, 현대의 AutoCAD에서 BIM에 이르기까지 기술은 언제나 건축사의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다리가 되어 주었다. AI역 이 거대한 흐름 위에 놓인 또 하나의 도구이지 않을까. 다만 이번에는 그 속도와 파급력이 사회 전반에 걸쳐 전례 없이 크다는 점이다.
AI는 수억 개의 데이터를 학습해 최적의 동선을 제시하고, 단 몇 초 만에 수십 가지 레퍼런스 이미지를 생성해낸다. 그러나 AI가 결코 답하지 못하는 질문이 있다. "이 땅에 왜 이 건물이 서 있어야 하는가." "이 집에서 살아갈 사람은 아침 햇살을 어떻게 맞이하는가." 데이터의 최적화와 우리 삶에 대한 통찰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AI만의 영역이 있고 인간으로서 건축사만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기능공'에서 '디렉터'로
AI와의 공존은 대체가 아닌 확장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건축사는 직접 도면을 그리는 역할에서 수많은 대안을 조율하고 방향을 결정하는 디렉터로 역할이 이동하지 않을까? AI가 공간의 철학과 개념을 받아 수천 가지 변주를 만들어내는 동안, 건축사는 그 가운데 클라이언트의 삶과 대지의 맥락에 가장 부합하는 '단 하나의 진실'을 골라내는 안목을 발휘해야 한다.
이것은 기술 과잉의 시대에 요구되는 핵심 역량이다. AI가 생성의 속도를 담당하는 시대일수록, 건축사의 선택과 판단은 오히려 더 무거워질 것이다. 결국 무엇을 남기도 무엇을 버릴 것인지는 AI가 아닌 사람이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차가운 알고리즘에 온기를 불어넣는 일
공존의 궁긍적인 이유는 사람에 있다. AI는 가장 효율적인 공간을 설계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행복한' 공간을 설계하는 법은 알지 못한다. 클라이언트가 오랫동안 꿈꿔온 거실에 어떤 빛이 머물게 할지, 거실의 창을 너머 마당이 맞닿는 경계를 어떻게 다룰지 등 이런 고민은 오직 사람을 향한 관심과 공감에서 비롯된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더 인간적인 공간, 나만을 위해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공간을 갈망한다.
차가운 알고리즘이 계산해 낸 결과물에 온기를 불어넣는 것이야말로 AI시대의 건축사에게 주어진 임무이지 않을까.
열린 마음과 비판적 시각
공존을 위해서는 두가지 태도가 동시에 필요하다. 하나는 새로운 기술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는 오픈 마인드다. AI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공포 대신, 이 유능한 AI파트너를 어떻게 활용해 전문성을 극대화할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AI의 결과물을 맹신하지 않는 비판적 시각이다. AI는 실수를 하고, 때로는 맥락 없는 결과물을 뻔뻔하게 내놓는다. 우리는 전문가로서 그 한계를 인식하고 인간의 통찰로 보완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AI와 건축사는 경쟁자가 아니다. 더 좋은 건축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함께 걷는 파트너다. AI가 수고로운 반복 작업을 대신하는 동안, 건축사는 더 높은 곳에서 삶의 맥락을 읽고 공간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연필 끝에서 나오던 깊은 고뇌가 프롬프트를 통해 전달되는 시대, 그 두 가지가 결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건축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
건축사 안소장 | 공간의 가치를 짓는 사람